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브라함 평원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1758년 6월 [[루이스버그 전투]]의 승리로 캐나다 프랑스 식민지의 중심지인 [[퀘벡 시|퀘벡]]을 공격하는 게 가능해진 영국군은 퀘벡을 향한 공세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루이스버그 전투 당시 부상을 입고 영국에서 휴식을 취했다가 1759년 2월 북미 대륙으로 돌아온 제임스 울프 장군은 [[세인트로렌스 강]]과 퀘벡 공략을 지휘하기 위해 몽크톤, 타운센드, 머레이 휘하의 3개 여단을 집결시켰다. 1759년 6월 첫째주, 울프의 군대는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진군을 개시했다. 한편 프랑스군은 적이 서부의 온타리오 호와 남부의 챔플레인 호수 방면에서 쳐들어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서 세인트 로런스 강 하류 방비는 상대적으로 허술했다. 결국 울프의 영국군이 세인트 로렌스 강의 남쪽 강둑에 위치한 포인트 레비를 손쉽게 공략하고 포인트 레비에 포대를 설치해 퀘벡의 로어타운을 포격 사정거리에 두자, 식민지 프랑스군 총사령관 루이 조제프 드 몽캄은 즉시 퀘벡에 5개의 정규 프랑스 대대와 캐나다 민병대, 그리고 천 명의 인디언들을 집결시켰다. 6월 26일, 울프는 퀘벡의 지형을 살펴본 뒤 보포르 주변의 세인트 로렌스 강 북쪽 해안이 부대의 상륙을 위한 가장 유리한 장소라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몽캄이 그곳 고지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해둬서, 그는 그 대신 몽모랑시 폭포로부터 동북쪽으로 1.2km 떨어진 북쪽 해안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밤에 몽모랑시 해안에 상륙한 울프는 진지를 구축한 뒤 7월 31일 몽캄이 세운 몽모랑시 요새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보포르 전투]]) 그러나 울프는 500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기록한 뒤 철수했다. 이렇듯 상황이 지지부진해지자 영국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게다가 8월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많은 병사들이 질병에 걸려 고통받았고 울프도 한동안 병환으로 고생했다. 이에 울프는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군대가 와해될 거라고 판단해 확실한 전과를 거두기 위한 새로운 공세를 계획했다. 그는 퀘벡 동쪽 방면의 해안 요새들은 방비가 탄탄하므로 세인트 로렌스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퀘벡의 서쪽 평원에 상륙한 뒤 퀘벡을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적이 그의 의도를 간파하면 곤란했기 때문에, 그는 퀘벡 동쪽 해안 요새들에 대한 위장 공세도 별도로 시행하기로 했다. 그는 이 공세를 9월이 끝나기 전에 감행하기로 했다. 그러던 9월 12일, 울프는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장군의 휘하 부대에서 탈영한 두 명의 프랑스 병사들로부터 프랑스 보급선이 다음 썰물 때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내려가 퀘벡 시에 물자를 공급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울프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자신이 먼저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내려가서 프랑스 보급함을 가장한 채 랑세-오-포울롱에 상륙한 뒤 방심한 적을 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울프의 소함대는 강을 따라 랑세-오-포울롱으로 나아가면서 프랜치-인디언 전쟁의 승자를 가릴 전투의 막이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